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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고현민훈 Date2026-09-11 22:57 View1 Count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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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이른 아침에 횡성호 습지에서 만난 풍경. 횡성호 습지에 낮게 깔린 안개 사이로 아침 볕이 스며들어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가을이 더 깊어지면 횡성호반에는 더 자욱한 안개가 낀다.
# 일상과 여행의 경계, 횡성
오전 여섯 시. 횡성호 상류에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물길을 낀 습지 위로 안개가 고이듯 내려앉아 산자락까지 지워 버렸다. 갓 떠오른 해가 산등성이를 넘자 안개 사이로 오렌지 색깔의 빛이 비껴들었다. 억새가 일제히 금빛으로 일어서고, 밤새 이슬을 머금은 풀들이 저마다 반짝였다. 그래 봐야 딱 10분쯤이었을 것이다. 안개는 이내 스러졌고, 습지는 다시 평범한 초록으로 돌아갔다.
이런 아침을 보겠다며 작정하고 나섰던 건 아니었다. 사실, 이즈음의 여행은 계획이란 걸 세울 것도 없다. 무얼 꼭 봐야겠다고 정하지도, 어디를 빠뜨리면 안 된다고 마음먹지 않아도 된다. 폭염의 여름이 끝나고, 선선한 바람 부는 ‘좋은 날’이 계속되고 있다. 이럴 때는 어디를 가도 그냥 다 좋다. 여행하기에는, 정말로 좋은 계절이다.
‘어디든 다 좋을 때’ 가는 곳의 목록에서는 ‘평소에도 좋은 곳’은 빼는 게 좋겠다. 평상시에는 매력이 좀 덜한, 그래서 호젓한 곳이 지금 가면 딱 좋을 곳이다. 그렇게 고른 곳이 강원 횡성이다. 횡성은 ‘일상의 내륙’과 ‘여행지 강원’을 가르는 경계다. 영동고속도로 원주나들목까지는 ‘일상의 도시’ 느낌이다. 경계는 횡성의 새말이다. 새말나들목을 지나야 비로소 ‘여행의 영역’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 느껴진다.
횡성에는 뭐가 있을까. 횡성 한우 말고는, 금방 답이 안 나온다. 20여 년 전쯤 횡성군이 ‘횡성 팔경’을 정한 적이 있다. 그때 뽑은 팔경이 다음과 같다. 병지방계곡, 태종대, 삼형제바위, 풍수원성당, 횡성온천, 민속 장터, 안흥찐빵 마을, 횡성댐. 지금은 물론이고, 행정이 팔을 걷어붙였던 그때도 횡성 팔경을 아는 이들이 없었다. 문제는 홍보가 아니라 ‘공감’이었다.
횡성의 명소는 다들 고만고만하다. 첫손으로 꼽을 만한 압도적인 곳이 없다. SNS에 넘쳐나는 복제 여행 정보만 봐도 사정을 알 수 있다. ‘횡성 팔경’이니 ‘가 볼 만한 열 곳’이니 하는 콘텐츠의 내용이 저마다 다르다. 개중에는 몇 해째 문 닫은 온천을 ‘제4경’으로 올려 둔 콘텐츠도 있다. 이맘때 횡성 여행에서 꼭 가 봐야 할 곳이란 건 없다. 순서를 따라 짚어 갈 일도 아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왜’냐고 묻지 않기로 한다. 제안하는 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다니는 여행’이다. 가을볕이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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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촉촉하게 내리는 날의 풍수원성당. 초기 풍수원성당을 재현한 초가집 툇마루에서 비를 피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 귀퉁이에 초가지붕이 걸렸다.
# 촉촉하게 비에 젖은 성당
풍수원성당을 먼저 갔다. 서원면 유현리, 6번 국도를 따라 양평에서 강원도로 막 접어들면 나오는 자그마한 산골 마을이다. 성당 외벽은 붉은 벽돌이 비에 젖어 색이 짙어졌다. 마당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성당 앞을 넓게 가리고 서서, 젖은 잎에서 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1910년 봉헌식 때 심었다는 나무니까 그 자리에 심긴 지 116년이 됐다.
성당 문을 밀고 들어섰다.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성당 안의 공기가 서늘했다. 종교를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거나, 오래된 성당에 들면 마음이 가지런하게 정돈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 깊은 산중의 오래 묵은 절집에 들었을 때와 다르지 않다. 한참을 앉아 있었다.
성당의 내력이 만만치 않다. 1802년 신태보 베드로를 비롯한 40여 명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들어왔다. 양평을 떠나 여드레를 헤맨 끝이었다. 그때만 해도 풍수원은 사람 그림자 구경하기 어려운 오지였다고 했다. 신유박해로 쫓기던 신자들은 ‘여기라면 들킬 염려가 없다’고 생각했다. 신앙 공동체를 이룬 이들은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우며 살았다. 그리고 신부 없이 기도하며 80년을 버텼다.
1888년에야 작은 한옥 초가집 본당을 가졌고, 1896년에는 정규하 신부가 부임했다. 그는 47년을 여기서 주임신부로 살았다. 성당을 지으려고 신자들이 엽전 1만5000냥을 모았는데, 정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 돈을 가지고는 부족한데 교우들은 짓기를 재촉합니다.” 완공을 앞두고 보낸 편지에는 또 이렇게 적었다. “돈이 넉넉지 못하여 잘 짓지는 못했습니다.”
잘 짓지 못했다고 했으나, 성당은 근사하다. 소박하면서도 품격 있다. 박해받던 이들의 신심과 지극한 마음을 대들보로 삼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성당은 의미가 깊다. 이 성당은 한국인 사제가 지은 최초의 성당이자,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 십자가의 길에서 만난 묘
성당 뒤편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길이 나 있다.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고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열네 장면을 새긴 돌비석이 숲길을 따라 늘어서 있다.
비 온 뒤라 숲이 유난히 청량했다. 젖은 흙냄새가 짙었다. 걸음이 절로 느려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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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하나를 보고 몇 걸음 걷고, 또 하나를 보고 몇 걸음 걷는다. 새소리와 나뭇잎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십자가의 길 끝에는 사제들의 묘가 있다. 풍수원성당의 주임신부로 47년을 살았던 정 신부의 묘도 있고, 그를 이어 부임했던 사제들의 묘도 있다. 그런데 사제 묘 뒤쪽의 후미진 자리에 봉분 없는 평장 묘가 하나 있다. 조이분 마리아 할머니의 묘다.
1891년에 태어나 여섯 살에 아버지를 잃었고, 아홉 살에 민며느리로 보내졌다. 시가에서는 시어머니의 학대와 구타로 한쪽 눈을 실명하고 고관절이 파열돼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렇게 쫓겨나 이곳저곳 전전하다 풍수원에 닿았다.
남의 아이를 봐 주고 살림을 거들며 지내던 그에게 정 신부가 문간채를 내주고 쌀을 조금 지원해 줬다. 그러자 그는 고아와 장애인 일곱을 데려다 함께 살기 시작했다. 산나물을 뜯고 땔감을 손수 장만해 가며 그들을 먹였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웠을 그가 쌀이 조금 생기자 일곱을 거뒀다.
그 뒤로도 고아 넷을 돌보고, 반신불수와 중증 치매인 두 할머니에게 밥을 떠먹이고 대소변을 받아 냈다. 6·25 때는 피란도 가지 않은 채 성당의 성물을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어 지켜 냈다. 동네 노인이 임종할 때면 며칠씩 밤을 새워 곁을 지켰다. 그렇게 평생을 살았던 할머니는 1971년에 눈을 감았다. 예수가 넘어지고 또 넘어지며 걸어간 길. 풍수원성당 십자가의 길 끝에는 조이분 마리아가 묻혀 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잘 알려진 순례 명소지만, 신도가 아니더라도 풍수원성당은 꼭 가 보길 권한다. 평화로움으로 가득한 충만한 가을날이라면 더 그렇다. 비신도가 성스러운 종교 공간을 여행 목적지로 삼는 것에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풍수원성당 일대는 2003년 유현문화관광지로 지정됐다. 성당 뒤쪽에 수목원을 조성하고, 유물전시관을 열었으며, 옛 여관 격인 원(院)을 복원해 놓았다. 성당 말고도 천천히 돌아볼 것들이 있다는 얘기. 관광지라곤 하지만 ‘이렇게 한산해도 될까’ 싶을 정도의 고즈넉함이 가장 큰 매력이다.
# 호수에 잠긴 다섯 마을
횡성호에 간 건 이른 새벽이었다. 전날 내린 비로 산허리마다 구름이 걸렸고, 젖은 숲에서는 김이 오르듯 안개가 피어올랐다. 아침 햇살이 퍼지면서 펼쳐지는 호수 주변 습지 풍경은 마치 인상파 화가가 유화물감을 두껍게 발라 그린 그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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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초입의 풍경이 이럴진대, 하루하루 가을 색이 더 짙어지면 얼마나 더 근사해질까.
횡성호는 2000년 횡성댐 완공으로 생긴 인공호다. 섬강 줄기의 계곡을 막아 물을 가두면서 갑천면의 다섯 마을이 물에 잠겼다. 구방리, 중금리, 화전리, 부동리, 포동리. 253세대 938명이 고향을 떠났다. 호숫가 망향의 동산에 자료관이 있다. 떠난 이들이 생활 용구와 기록 사진을 모으고, 수몰 전 마을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두었다. 전시된 마을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잠긴 것이 논밭과 집터만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물에 잠긴 포동리에는 예순 해쯤 전까지 열 명을 태우는 나룻배가 드나들던 나루터가 있었다. 부동리는 봉우리 정상의 큰 바위 셋이 가마솥을 닮아 가마골이라 불렸고, 1500마지기 넘는 들에는 농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중금리에는 짝바위, 숲밖에, 군량골, 아랫말, 대문안골 같은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자료관에는 1997년 48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폐교한 화성초등학교의 사연도 있다. 1946년 중금리 공회당에서 아흔네 명의 학생으로 개교했고 6·25 때 잠시 휴교했다가 수복 후 다시 열었으며 그렇게 오십 년을 이어 오다 수몰로 문을 닫기까지의 학교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횡성호에는 ‘횡성호수길’이 있다. 6개 구간으로 이뤄진 전체 31.5㎞의 걷기 길이다. 처음 길을 낼 때는 지역에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데, 먼저 알아본 관광객들이 밀려들면서 일약 명소가 됐다. 개장 초기 주말마다 몰려든 관광객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바람에 주차장을 3배나 늘렸을 정도다.
호수를 끼고 도는 걷기 길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건 5구간이다. 전체 구간 중 유일하게 출발했던 자리로 되돌아오는 원.회귀코스다. 전체 구간이 9㎞ 정도로 세 시간쯤 걸린다. 5구간도 A코스와 B코스로 나뉘어 있어 각각 4.5㎞씩 걸을 수 있는데, 시간이 넉넉하지 않거나 짧게 걷고 싶다면 B코스를 추천한다.
안흥면사무소 앞의 찐빵 가게. 안흥찐빵의 내력은 영동고속도로가 놓이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횡성이 아닌 ‘안흥찐빵’인 이유
횡성에는 안흥면이 있다. ‘안흥찐빵’의 그 안흥이다. 면 소재지에 들어서면 찐빵 간판을 단 집들이 줄지어 늘어섰고, 가게마다 김이 오른다.
안흥찐빵의 역사는 60여 년이다. 1960년 무렵 심순녀라는 이가 시작했는데, 다섯 남매를 굶기지 않으려고 벌인 장사였다. 음식 장사를 하면 팔다 남은 것으로나마 식구들 허기를 달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고 한다. 처음의 찐빵은 팔려고 만든 게 아니라 ‘팔다 남기려고’ 만들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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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호두과자이고 경주 황남빵인데, 횡성 찐빵이 아니라 굳이 ‘안흥찐빵’이다. 여기에는 명확한 지리적 이유가 있다. 안흥은 조선 시대 안흥역과 실미원이 있던 길목이다. 그 길을 따라 42번 국도가 지나간다. 42번 국도는 영동고속도로가 뚫리기 전까지 서울과 강릉을 오가는 버스가 분주하게 다니던 길이었다.
42번 국도 안흥면 소재지 서쪽에는 새말로 넘어가는 전재라는 험준한 고개가 있고, 동쪽에는 평창 방림으로 넘어가는 문재가 있다. 전재와 문재 고개 사이에 있는 안흥면은 고개 하나를 넘어온 버스가 다음 고개를 넘기 전에 쉬어 가던 곳이었다. 힘겹게 고개를 넘어온 차들이 다음 고개를 앞두고 안흥에서 쉬어 가는 사이에 사람들은 찐빵 몇 개로 허기를 달랬다. 지금의 안흥찐빵 명성은 그때 먹던 찐빵의 맛을 기억하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고개 대신 터널이 뚫린 지 오래고, 고개를 넘은 차가 쉬어 갈 이유도 사라졌지만, 여전히 찐빵집은 안흥에만 촘촘하게 들어서 있다. 찐빵의 독。 권리를 인정해 줘서 그런 건 물론 아니다. 아직도 안흥찐빵을 안흥에서만 사 가는 여행자들을 보면, 찐빵 하나에도 시장논리보다 더 끈끈한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안흥찐빵과 관련한 또 다른 얘기가 있다. 안흥면 소재지에서 상안리 쪽으로 조금 가면 길가에 벼랑이 하나 있다. 삼형제바위다. 주르륵 이어진 산자락이 통째로 바위로 드러났는데, 그 위로 소나무가 얹혀 있다. 세 봉우리를 각각 맏이봉, 둘째봉, 막내봉이라 부른다.
안내판에 적어 놓은 유래가 재미있다. 길손의 먹을 것을 빼앗던 도깨비 삼 형제가 팥 든 빵을 먹고 바위로 굳었다는 것이다. 붉은 팥이 귀신에게 해롭다는 신선의 말을 듣고 현감이 꾸민 일이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편안함이 절로 인다’는 안흥(安興)이 되었고, 안흥찐빵은 길손의 필수품이 되었단다.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얘기다. 찐빵의 역사가 60년이고, 밀가루가 흔해진 것도 원조 밀가루가 포대째 들어온 뒤의 일이다. 찐빵이 유명해지고 난 후에 바느질하듯 기워 붙인 이야기일 게다.
오원저수지 부근 카페 ‘꼼방’의 내부. 벽 한쪽 전체를 채운 2만 장의 LP를 마음대로 꺼내어 보고 음악을 청해 들을 수 있는 곳이다. 오래된 명반들이 많다.
# 벽을 가득 채운 LP 2만 장
안흥에서 42번 국도로 횡성읍으로 가는 중간쯤에 우천면 오원리가 있다. 오원리에는 오원저수지가 있고,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하얀 집이 한 채 있다. 카페 ‘꼼방’이다. 관광지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 시골 동네인데, 일부러 이 카페를 찾아 여기까지 오는 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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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는 한쪽 벽 전체가 온통 LP다. LP를 꽂은 책꽂이가 천장까지 닿아 위쪽 음반을 꺼내려면 사다리를 놓아야 한다. 2만 장쯤 된다고 했다. 가만 들여다보니 작곡가 이름표를 붙여 알파벳순으로 세워 두었다. 멘델스존, 오펜바흐, 파가니니, 푸치니,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클래식 음반만 있는 건 아니다. 다른 벽에는 가요 LP를 모아 두었고 국악 음반도 적지 않다.
주인은 경기 분당에 살다 퇴직한 뒤, 2018년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으로 왔다. 한창때는 인터넷 동호회를 운영하며 오디오를 직접 만들었던 열혈 오디오 마니아 출신이다. 그가 모아 놓은 음반은 라이선스판이 아닌 거의 전부가 직수입한 ‘원판’이다. 그걸 그는 ‘그라모폰 노란 딱지’라 불렀다. 노란 딱지 음반은 라이선스 음반 가격의 두 배가 훨씬 넘었다. 한창 LP를 사들였던 1990년대 초반, 원판 한 장 가격이 1만5000원쯤 했다. 자장면 한 그릇에 1200원을 받던 시절이었다.
평생을 바쳐 손수 사 모은 2만 장의 LP는 귀한 수집품이다. 모을 때의 수고로 봐도 그렇고, 들인 비용으로 봐도 그렇다. 유리 진열장 안에 넣어 두고 손도 못 대게 할 법한데, 여기서는 누구나 마음껏 꺼내 보고 원하는 곡을 찾아서 ‘틀어 달라’고 할 수 있다. ‘저렇게 아무렇게나 관리해도 되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 그 얘길 했더니 카페 주인은 “모셔 두기 위해 모은 게 아니라 들으려고 모은 것”이라며 웃었다.
이곳에서는 매장에서 직접 볶은 원두로 내리는 진한 향의 핸드드립 커피가 잘 어울린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주인이 골라 주는 음악을 들어도 좋고, 추억을 되새길 법한 음반을 직접 찾아 틀어 주길 청해도 좋다.
횡성에서 좋았던 건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오래된 성당 마루에 앉아 듣던 빗소리, 물방울 떨어지는 숲길을 천천히 걸었던 한 시간, 안개가 걷히며 억새가 반짝이던 10분, 그리고 창가에서 음악을 듣던 오후…. 애초에 꼭 봐야 할 것도, 빠뜨리면 안 될 것도 없었다. 완연한 가을이다. 이런 여행을 하기에 딱 좋은, 축복 같은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 카페 ‘노랑공장’
횡성읍 옥동리에는 옛 물류창고를 개조해 만든 카페 ‘노랑공장’이 있다. 마당부터 요란하다. 런던 이층버스가 서 있고, 그 옆에 샌프란시스코 올드타운 트롤리가 놓였다. 건물에는 노랑과 검정과 빨강 줄무늬를 칠하고 지붕에는 노란 굴뚝 장식을 올렸다. 창고 벽면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액자와 포스터, LP 재킷, 커피 마대자루로 빼곡하다. 앤티크 가구와 타자기, 다이얼 전화기, 백과사전 전질, 금빛 조각상…. 물건에는 가격표가 붙었다. 카페이자 앤티크 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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