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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고현민훈 Date2026-09-05 17:00 View4 Count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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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팔경 중 하나인 사인암. 반듯한 선의 바위가 마치 먹줄을 튕겨서 잘라 낸 것 같다.
계곡물에 발 담그는 여름이 가고, 물가에 앉아서 바위를 보는 가을의 초입이다. 경관이야 늘 같은데, 달라지는 건 사람이다. 한여름에는 충북 단양엘 가도 경관이나 풍류가 잘 보이지 않았다. 모든 의욕을 다 녹여 버릴 듯 뜨거웠던 폭염 아래서는 명승이니 운치니 하는 건 죄다 사치였으니까. 인물의 자취나 이야기의 감동보다는, 그저 남조천이나 새밭계곡의 그늘과 계곡물만 반가웠을 따름이다.
이제 더위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인파가 빠져나가자 단양에서 보이는 건 경관과 풍류다. 가까이 가 보면 명승의 바위마다 글씨가 빼곡하다. 누군가의 이름이고, 누군가의 시(詩)다. 옛사람들도 딱 이때쯤 단양을 많이 찾았다. 바위를 보러 온 이들이 보고 나서는 제 이름을 새기고 떠났다.
단양팔경에 새겨진 글이 593건. 그중 236건이 사인암 한 곳이다. 절벽 하나에 팔경 전체의 글 40%를 새겼다. 이쯤이면 사인암(舍人巖)이 아니라 ‘사인(Sign)암’이다. 사인암 한쪽에 이런 글귀가 있다. ‘구름꽃 같은 절벽에 삼가 이름을 새기지 마라.’ 。잖게 나무라는 글귀를 새긴 이는 조선 후기 문인화가 이인상이다. ‘오호~’하고 감탄했지만, 금세 감탄을 거둬들였다. 그랬던 그도 바위에다 이름을 남겼으니까. 이른바 ‘내로남불’의 배신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다. 이름을 새기고자 하는 열망을 주체할 수 없었을 정도로, 사인암 일대 경관이 감동적이었다는 얘기도 되니까.
명승 즐비한 단양에서 비경마다 새겨진 이름을 길잡이 삼아 여행코스를 제안한다. 거리(距離)나 동선의 효율이 아니라, 딸려 나오는 사람 이야기로 매듭을 지어 가며 하는 여행이다. 지역 명소 목록을 밑줄 쳐 가며 빠짐없이 섭렵하는 촘촘한 여행도 좋지만, 사람과 이름의 자취를 따라가는 이런 성근 여행도 즐겁다. 같은 목적지로 가는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여행이라면 더더욱 권한다.
사인암을 끼고 있는 절집 청련암의 극락보전.
# 도끼를 지고 대궐로 들어가다
옛 선비들의 ‘사인’ 그득한 사인암부터 간다. 사인암은 대강면 남조천 가에 있다. 아홉 굽이를 휘돌며 ‘신선의 경치’를 이룬다 해서 운선구곡(雲仙九曲)이라 불리는 물길이다. 그 물이 청록빛 소를 이룬 자리에 높이 70m 수직 절벽이 병풍처럼 섰다.
날 선 사각 바위 수십 개를 정교하게 짜맞춘 듯한 형상이다. 예리한 칼로 ‘밭 전(田)’ 자 무늬를 새긴 것 같기도 하다. 먹물빛 암벽에 녹색과 황토색이 군데군데 교차해 그 자체로 추상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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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와 본 추사 김정희는 ‘색색 비단으로 짠 듯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 그림 같다’고 했다. 꼭대기 바위틈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한 줌 흙 기운만으로 수백 년을 버티고 섰다. 자연이 가꾼 그윽한 분재다.
이름부터 짚는다. 사인암의 ‘사인(舍人)’은 고려 때 정4품 벼슬. 지금으로 치면 ‘국무조정실 국장급’ 정도 된다. 이 벼슬을 지낸 이가 우탁이다. 단양이 본관이고 적성면이 고향인 그가, 사인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이곳을 자주 찾았다 한다. 그가 지낸 벼슬이 바위 이름이 된 건, 그가 세상을 뜨고 100년도 더 지난 뒤였다. 조선 성종 때 단양 군수가 그를 기려 사인암이라 불렀다. 남이 붙여 준 이름이었다.
우탁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면 이 대목이 예사롭지 않다. 충선왕은 즉위해 죽은 아버지(충렬왕)의 후궁을 범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왕의 노여움이 두려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을 때, 우탁이 흰옷 차림으로 나타났다. 도끼를 지니고 올린 상소, 우리 역사상 최초의 ‘지부상소(持斧上疏)’였다. “받아들이지 않으려거든 이 도끼로 내 목을 치라”는 뜻이다. 상소가 어찌나 격렬했던지 승지가 펴 들고도 오금이 저려 읽지 못했을 정도였다던가. 벼슬을 내놓고 물러난 우탁은 왕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내 사양했다. 그가 남긴 지부상소의 전통은 뒷날 조헌으로, 최익현으로 이어진다.
사인암 뒤쪽 작은 암자 청련암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쪽에는 나중에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밝혀졌지만 오랫동안 우탁이 쓴 것으로 알려졌던 글씨가 남아 있다. ‘탁이불군(卓爾不群·뛰어나되 무리 짓지 않는다) 확호불발(確乎不拔·확고하여 뿌리 뽑히지 않는다). 독립불구(獨立不懼·홀로 서도 두렵지 않다) 둔세무민(遁世無悶·세상을 등져도 근심이 없다).’ 글씨가 우탁의 것으로 여겨졌던 건, 글에 담긴 내용이 도끼를 지고 대궐로 걸어 들어간 그의 이력과 그대로 포개져서다.
시루섬 기적의 다리 입구에 세워진 아이 안은 어머니 조형물. 절체절명의 재난 속에서 혹시 이웃들이 동요할까 봐 자식이 질식해 숨을 거둔 걸 알리지 않은 어머니를 형상화했다.
# 이름을 새기지 말라고?… 나만 빼고
우탁의 것으로 전해졌던 글씨 곁에는 400년쯤 뒤에 새긴 글씨가 있다. 1751년 봄, 선비 세 사람이 함께 모여 새긴 시다. ‘먹줄로 그은 듯 저울로 단 듯, 옥빛에 경쇠 소리. 우러를수록 더욱 높고, 우뚝하여 이름 붙일 수조차 없네.’ 시는 새로 지은 게 아니라 옛글에서 한 구절씩 빌려 이어 붙여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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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려 온 문장들의 출처가 눈길을 끈다. 앞의 두 구절은 주자(朱子)의 글에서, 뒤의 두 구절은 논어(論語)에서 가져왔다.
하나같이 성인(聖人)의 인격을 기리던 말이다. 그 말을 모아 바위에 바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사인암을 ‘석장(石丈)’, 곧 ‘돌 어른’이라 불렀다. 사람에게나 올리던 찬사를 돌에 바친 셈이다. 그러고는 끝에다 이렇게 새겼다. ‘신미춘(辛未春) 윤지 정부 원령 찬(讚).’ 신미년 봄에 윤지와 정부, 그리고 원령이 지었다는 뜻이다. 윤지는 이윤영, 정부는 김종수, 원령은 이인상의 자(字)다.
나란히 남긴 세 사람의 이름 중에서 이인상이 눈에 띈다. 앞에서 말했던 ‘바위에 이름을 새기지 말라’고 훈계했던 그 이인상이다. 세 사람이 함께 골라낸 글을 직접 제 손으로 바위에다 글씨로 새겼으니 이인상은 ‘가담자’가 아닌 ‘주모자’였다. 그 마음을 경계하라 적어 둔 사람조차 결국 같은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정색하고 나무랄 것까진 없겠다. 지금이야 빼어난 경관의 감흥을 기념하려면 사진으로 찍어 가져가면 되지만, 그때는 경관을 가져갈 도리가 없었으니 거기다 제 자취를 남겨 두고 올 수밖에…. 앞다퉈 제 이름을 바위에 새기고, 시문을 지어 바위에다 남긴 까닭이다. 그게 그 시절의 ‘인증샷’이었던 셈이다.
행적을 뒤지다 보니 이인상의 ‘내로남불’쯤은 슬쩍 눈감아 줘도 좋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서얼로 태어나 평생 하급직을 떠돈 사람이다. 단양이 좋아 옥순봉 아래 정자를 짓고 눌러살고 싶어 했지만, 노모와 가난에 발이 묶였다. 단양에서 차로 한 시간 반이면 닿는 지척에 살면서 끝내 오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살러 오지 못한 자리에 이름이라도 두고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쯤은 봐줘도 되는 게 아닐까.
그가 남긴 그림에 ‘설송도’가 있다. 뿌리를 앙상하게 드러낸 채 눈보라를 견디는 두 그루 늙은 소나무다. 서얼로 멸시를 견디며 산 자신의 초상이었을 것이다. 사인암 꼭대기에도 그런 소나무가 자란다. 바위틈에 뿌리 박고 버티고 있는 나무들이다.
# 핫플레이스에 새겨진 이름들
사인암에 새겨진 이름을 읽는 재미가 있다. 절벽 한가운데 잘 보이는 붉은색 글씨가 있다. 낭원군중유계유동(朗原君重遊癸酉冬). 낭원군이 계유년 겨울에 ‘다시’ 유람 왔다는 뜻이다. 방문이 이번 한 번이 아니었다는 얘기. 낭원군으로 불렸던 이간은 선조 임금의 아들인 인흥군의 아들이다. 직계로 이어지는 당당한 왕의 종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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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서적 감수성이 풍부한 데다가 학문도 능해 시가(詩歌)를 잘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그가 인증샷을 남기고 갔을 만큼 사인암은 ‘핫플레이스’였다.
낭원군 각자 바로 아래에 또렷한 이름이 있다. 정의동(鄭義東). 1902년 단양 군수를 지냈다. 동학혁명 때 동학군이 군수인 그에게 수탈과 폭압 등 폐정을 묻고 축출하고자 관아로 쳐들어갔는데, 이미 몰래 달아나서 화를 피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까지 보면 영락없는 ‘탐관오리’인데 이후의 행적을 보면,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뒤에 다시 얘기할 단양 수몰이주기념관 마당에, 뜻밖에 그를 기리는 선정비가 있다. 비석이 기리는 그의 선정은 ‘흉년을 당한 단양군의 세금을 줄여 줄 것을 상소했다’는 것이다. 상소로 진짜 세금이 깎였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그는 탐관오리였을까, 아니면 선정을 베푼 청백리였을까. 아무튼 그는 단양 군수를 지내고 곧바로 지금의 국회의원쯤 되는 중추원 의관으로 자리를 옮겨 갔으니 승승장구한 셈이다.
개중에는 남기지 않는 편이 나았겠다 싶은 이름들도 있다. 붉은 큰 글씨로 적은 찰방 벼슬의 어떤 이는 역졸들에게 달걀과 생강을 징수하고 역마 운용비에 손을 댔다가 암행어사에게 걸려 쫓겨난 사실이 실록에 남아 있다. 일제강.기 중추원 참의를 지낸 반민족행위자의 이름도 이 바위에 있다. 남긴 이름으로 두고두고 손가락질을 받게 된 경우다.
단양의 장회나루 쪽에서 본 충주호. 왼쪽의 봉우리가 단양팔경인 구담봉이다. 토정 이지함의 형인 이지번이 칩거하며 신선처럼 살았다는 곳이다.
# 신선이 살던 구담봉, 가난뱅이가 살던 옥순봉
장회나루에서 유람선을 타면 단양팔경인 구담봉과 옥순봉이 차례로 나타난다. 바위가 옥빛으로 솟은 것이 죽순 같다 해서 옥순봉이다.
이 물길에는 이야기가 겹겹이다. 구담봉에는 조선 명종 때의 문신 이지번이 살았다. 토정 이지함의 형이다. 윤원형의 횡포에 맞서 벼슬을 던지고 이곳에 은거했는데, 두 봉우리에 칡 밧줄을 걸고 학 모양을 매달아 타고 다니니 백성들이 그를 신선으로 여겼다. 그가 떠난 뒤 창고를 열어 보니 다른 건 없고 칡 밧줄만 가득했다고 야담집 ‘어우야담’은 전한다.
구담봉에 신선이 있었다면 옥순봉 아래에는 ‘가난뱅이 김남포’가 살았다. 어느 날 방랑 시인 김삿갓이 그를 찾아왔다. 멀리서 온 나그네에게 밥 한 끼 지어 주지 못하고 멀건 죽 한 그릇을 내놓았는데, 그 죽이 어찌나 묽었던지 하늘의 별과 달이 그릇에 비쳤다. 김삿갓이 수저를 들다 말고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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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명산은 옥순봉이요 / 세상의 괴한은 김남포라 / 사각 소나무 소반에 묽은 죽 한 그릇 / 그 안에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노니네.’
주인이 무안해 할 법한 상황을 김삿갓은 재치로 건너뛰었다. 가난한 촌로의 멀건 죽에다 하늘과 구름을 담는 운치라니…. 김남포는 없는 살림에도 나그네를 먹였고, 나그네는 밥값, 아니 죽값을 시로 갚은 셈이었다.
김남포는 누구일까. 그를 수소문하다가 도담삼봉까지 갔다. 본명 김종호. 무과에 급제해서 지금의 충남 보령 땅인 남포 현감을 지냈다. 김남포란 남포 현감을 지냈다고 사람들이 붙여 준 별명이었다.
그의 무덤은 도담삼봉 뒤편 능선에 있다. 찾기가 쉽지 않았다. 덤불에 길이 끊겨 군청과 문화원에 거듭 수소문한 끝에야 소나무 숲 안쪽에서 겨우 찾아냈다. 묘비에 내력이 적혔다. 1770년에 나서 1848년에 죽었으니 일흔여덟을 살았다. 대대로 지금의 의왕 땅에 살다가 아버지 대에 용인으로 옮겼다.
말년에 산수 수려한 곳을 찾아 소백산 아래 금곡리로 옮겼는데, 너무 깊고 후미져 아쉬웠다고 한다. 몇 해 뒤 그는 거처를 다시 옮겼다. 옮겨 간 곳이 바로 도담삼봉 앞이었다. 경치 하나 보고 두 번이나 이사한 사람이다. 그것도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들 바위에 이름 석 자 새기고 돌아갔지만, 그는 명승 곁으로 남은 생애를 통째로 가져왔던 셈이다. 그리고 그는 죽어서도 도담삼봉 기슭에 묻혔다.
단양팔경의 간판 격이라 할 수 있는 도담삼봉.
# 수몰 지역에서 건져 올린 이름들
단성면 하방리에는 수몰이주기념관이 있다. 1985년 충주댐으로 물에 잠긴 구(舊) 단양 사람들의 기념관이다. 기념관은 주민들도 잘 모른다. 수몰의 기억은 。. 멀어지고, 관광객은 관심조차 없으니…. 기념관은 2층 규모의 조촐한 건물인데, 정작 볼 것은 건물 안이 아니라 마당에 있다. 충주댐 담수로 물에 잠길 뻔한 것들을 가져다 여기 모아 놓았다.
먼저 퇴계의 글씨 둘이 있다. ‘탁오대(濯吾坮)’와 ‘복도별업(復道別業)’이다. 원래 단양천변에 있던 것을 수몰을 앞두고 옮겨 왔다. 탁오대는 ‘나를 씻는 곳’이라는 뜻. 퇴계가 단양군수 시절 이 자리에서 매일 손발을 씻었는데 마을까지 깨끗해졌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 전한다. 복도별업은 ‘도를 회복하는 별장’이라는 뜻으로, 그가 논에 물을 대려 만든 저수지 곁에 새긴 것이다. 사인암에 빽빽하게 새겨진 이름이 ‘내가 여기 왔다’는 표식이라면, 이 두 글씨는 ‘나를 씻겠다’는 다짐이다. 같은 돌에 새긴 글씨지만 품격이 다르다.
마당에는 비석이 늘어서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이 황준량 선정비다. 1557년 단양 군수로 부임한 그가 온 고을을 되살린 공을 기려 백성들이 세웠다. 그가 부임했을 당시, 단양은 폐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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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200호가 넘는 고을이었는데 홍수와 흉년이 겹치면서 처자식을 이끌고 먹을 것을 찾아 떠나니 관내에 겨우 40호만 남았을 따름이다.
황준량은 조정에 4800자나 되는 상소를 올렸다. 피폐한 백성들의 비참한 삶에 대한 측은지심의 절절한 마음을 담은 글이었다. 그는 상소문에서 ‘풍년이 들어도 반쯤은 콩을 먹어야 하고, 흉년이면 도토리로 연명하는데 세금은 다른 고을의 몇 곱절이라, 한 집이 100호의 부역을 감당하고 장정 하나가 100사람 몫을 진다’고 호소했다. 그러고는 대궐로 찾아가 열흘을 엎드렸다. 감동한 명종 임금은 10년간 조세와 부역을 면제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공신도 아닌 백성이 10년 면제를 받은 건 조선 50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이다.
# 지워진 이름과 선명한 이름
황준량은 3년 뒤 성주 목사로 떠났고 마흔일곱에 죽었다. 얼마나 청빈했던지 수의 만들 삼베가 없어 빌려다 염을 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그를 기리는 비석은 한쪽 귀퉁이가 깨졌고 글씨는 마멸돼 읽을 수가 없다.
황준량 선정비의 두어 걸음 옆에 다른 비석이 있다. ‘군수 성진묵 애민선정비’다. 백성을 사랑하고 선정을 베풀었다고 세운 비석인데, 성진묵은 1819년 단양 군수로 왔다가 3년 뒤 암행어사의 감찰에 걸려 파직된 인물이다. 충청좌도 암행어사 서좌보가 아홉 명의 수령을 ‘다스리지 못한 정상’으로 논핵한 명단에 그가 있었다. 암행어사는 같은 보고에서 군정과 전부, 환곡의 폐단을 함께 아뢰었다. 군역과 토지세, 그리고 고리대금업이나 다름없던 환곡이다. 놀라운 건 선정비가 파직당한 바로 그해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학정과 수탈의 주역으로 지목돼 동학군에 습격당했던 단양 군수 정의동의 선정비와 경우가 비슷하다.
무슨 사연인지는 알 길이 없다. 비위로 떠나는 수령이 아전을 시켜 세우게 한 것인지, 조정의 판단과 고을 사람들의 마음이 달랐던 것인지. 다만 눈앞의 광경은 분명하다. 고을을 되살린 사람의 비석은 글씨가 지워져 읽을 수 없고, 파직당한 사람의 비석에는 ‘애민(愛民)’ 두 글자가 또렷하다. 돌에 새긴 이름은 오래간다. 하지만 분명한 건 오래가는 것과 오래 기억되는 것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 ‘시루섬의 기적’ 출렁다리
단양역 국도변 수양개유적로 부근에 ‘시루섬의 기적’ 출렁다리 보행교가 놓였다. 1972년 8월 19일. 태풍 베티로 단양강이 범람했던 당시의 기적을 증거하는 다리다. 그날 시루섬에서 물에 잠기지 않은 건 물탱크밖에 없었다. 주민 198명이 20㎡(6평)의 물탱크 위에 올라가 온 힘을 다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절망의 밤을 새웠다. 이 과정에서 갓난아이가 질식해 숨을 거뒀지만, 주민들이 동요할까 봐 어머니는 피눈물을 삼키며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단 왼쪽에는 나중에